3층 창가에 서서 하염없이 걷는다. 창 밖을 바라보니 봄비가 촐촐히도 나린다. 아침나절 운동을 가 고무 벨트 위를 걸으며 창 밖을 본다. 우리 동네의 명물이라는 벚꽃길이 눈 앞에 한 2백 여 미터 쯤 펼쳐져 있다. 요 며칠 사이 아내와 매일 이 길을 걸었다. 벚꽃의 눈부신 빛깔과 그 은근한 향기를 누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이제 며칠만 지나면, 아니 바람 불고 비만 한 번 내리면 이 모든 아름다움이 그야말로 산화(散花)되어 사라질 것이라는 걱정때문이었다. 연분홍과 흰색의 벚꽃들이 하늘을 모두 가리고 터널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과장을 조금 보태 장관이라 하겠다. 난만(爛漫)-꽃이 한창 만발하여 성하게. 빛이나 광채가 어지럽도록 강하고 선명하게.-하다는 말은 참으로 이럴 때 어울리는 말인 듯 싶다.
이런 아름다움이 조금 있으면 낙화로 스려지고 우리는 또 다시 1년을 기다려야만 그 빛나는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기에 매일 그 길을 걷는 것이 수고로움보다 감질나는 기쁨과 아슬아슬한 즐거움의 조마조마함을 맘껏 느꼈었다.
그런데 오늘 비가 나린다. 벚꽃 잎들이 마치 하얀 수의처럼 길거리를 덮고 나의 마음 한 구석도 알 수 없는 슬픔에 저릿하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등굣길에 활짝 피었던 벚꽃을 보며 즐거워 하던 어느 날도 오늘처럼 봄비가 함뿍 내렸다. 아침 나절 다시 학교를 가려 나섰더니 그 눈부시던 꽃들이 모두 길바닥에 흩뿌려져 지고 말았다. 마치 한창 청춘의 불꽃을 불태우며 아름답게 빛나던 소녀가 내 앞에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처럼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삶과 죽음, 청춘과 쇠락이라는 전혀 까까머리 중학생과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주제들로 머리 속이 복잡했다. 우울한 마음으로 돌아 온 집. 그날 밤 죽음과 시간의 두려움, 아름다움의 소멸에 슬퍼 밤새 잠 못 이루고 눈물 흘렸던 기억이 새록 새록하다. 아마도 오늘 이 시점도 그런 감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이겠지.
잠시 이런 감상에 잠겨 있는 사이 내 눈 앞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진다. 죽음으로, 저 아래 땅 속 깊은 곳, 더러운 길바닥으로 처박히기만 하던 벚꽃잎들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여긴 분명 허허한 공중이며, 3층 높이의 하늘 한 가운데가 아니던가? 비바람이 불고 그 바람이 건물에 부딪히며 지금 막 꽃자루에서 떨어진 꽃잎들을 공중으로 하늘로 불어 올렸다. 수많은 꽃잎들이 나 눈 앞에서 춤을 추다 하늘로 올라간다. 아름다운 청춘은 죽음 앞에서 조차 승화되어 눈부신 춤으로 승천(昇天)하는도다.
벚나무의 청춘은 꽃이다. 내 인생의 청춘인 20~30대에 나 역시 꽃이었겠지. 벚꽃의 청춘은 내 앞에서 저렇게 아름다움을 빛내다 죽음조차 황홀할 정도로 멋진 피날레를 보여준다. 내 청춘의 꽃은 저리도 빛나고 아름다웠었나? 나는 진정 타오르는 불꽃처럼 난만(爛漫)히 피었다가 멋지게 승화된 적이 있었던가? 좀 대답하는데 자신이 없어진다. 점점 우울해지려는 나의 마음을 다 잡아 본다.
비록 꽃잎의 빛나는 빛깔과 그 향기는 사라졌지만 아직 푸르게 푸르게 자라나오는 반짝이는 초록의 벚나무 잎들이 있지 않은가? 뜨거운 여름을 생명으로 가득 채울 푸른 잎들이 남아 있지 않은가? 나의 삶도 벚나무의 잎들처럼 아직은 살아있고 힘차게 삶을 누릴 시간이 무척이나 많이 남아있다. 비록 벚꽃을 내년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나의 삶에서는 할 수 없으며, 나의 겨울은 다시 돌아오는 봄을 맞지 못할 것을 알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름과 강을의 기나긴 시간이 삶을 빛낼 시간이 남았음을 기억하며 살며시 웃어 본다.
40대의 푸르른 이파리로 살자. 힘내고 삶을 누리자. 마음 속으로 외쳐 본다.
이재훈 (2012/05/02 01:19:34)
푸른 잎으로 살다보면
다른 꽃이 필 때가 있지 않을까요? ^^
잎으로 살리라(박노해)
꽃이 아니라
잎으로 돋는다
꽃으로 나서기 보다
잎으로 받쳐 드린다
꽃처럼 피었다 지기 보다
언 땅에 먼저 트고 나중에 지는
나는 잎으로 살리라
푸른 나무 아래서
너는 말하리라
꽃이 아름다웠다고
떨어져 뿌리를 덮으며 나는 말하리라
눈부신 꽃들고 아름답지만
잎이어서 더 푸르른 삶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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