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2003-03-17 00:35:06)

윤나연

02학번 윤나연, 제 357차 기러기 산행 신고합니다!

아~ 피곤기가 손가락 끝마다 묻어납니다.. 오타가 간혹 있더라도 너그럽게

넘어가 주시길.. 그래도 첫빵으로 쓰고 싶은 맘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를 켭

니다..

2003년 3월 16일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더군요..

새벽 여섯시에 모닝콜 해 준다고 새내기들한테 큰소리치고 정작 저는 여덟시에 일어났어요..ㅡ,ㅡ^

오랜만에 집에 내려가서 편해서 그런지 잠이 잘 오더군요.

여덟시 반쯤에  아빠차를 차고 서산 마애삼존불상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예산에서는 딱 한 시간이 걸리더군요.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비에 젖었

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했습니다. 고향이란 이런거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

다. 말없이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곳..

일찍 도착해서 비를 피해 식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창밖으로 비에 젖은 나뭇가지들을 보며 일행을 기다렸습니다.

아, 저기 보입니다. 버스 한 대. 그리고 지난 번 유명산에서 뵌 선배님 한 분도 보입니다.

전원 서른 여섯명. 부부동반으로 오신 선배님들이 보기 좋아보였습니다.

부럽기도 하고요.

가뿐하게 올라가서 마애삼존불상을 만났습니다.

아..  얼굴이 복스럽게 생긴게 귀엽기 그지 없습니다. 인자한 것 같기도 하고.. 편안합니다..

내려가는 길에 소원을 빌면서 돌탑을 쌓았습니다.

-  올해는 좋은 사람 만나게 해 주세요..

마애삼존불과 헤어지고 가야산 입구 어느 넓은 절터에서 시산제를 지냈습니다.

산행대장 민호 선배가 무슨 시 같은 걸 읊었습니다. 아마 나라 안팎으로 편

안하고 우리 모두 자연과 더불어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비는 모양입니다.

마치 옛날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착한 사람들로 돌아가는 느낌이었습니

다.

커가면서 이런 의식의 의미를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는 건 격식을 따지

고 관습을 중시하는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라기보다는 조금 더 겸손해질

줄 알았다는 표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감히 듭니다.

우리는 절도 하고 음복도 했습니다. 시루떡이랑 고기 무지 맛있었어요..

  드디어 가야산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입구에서는 약간 가파랐으나 갈수록

완만하고 타기 쉽습니다.

낙엽이 많이 쌓여서 땅이 푹신푹신하기도 하고요.. 별 무리 없이 편안한 산생이었습니다.

정말 기분이 상쾌했어요. 산을 오르기 전엔 귀차니즘이 발동하고 좀 망설여

지는데 막상 오르고나니 이렇게 좋더군요.

무슨 일을 시작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다가

도 귀찮아하거나 겁을 먹어서 그만 두는 일이 많은데 일단 시작하고 산을 오

르듯 천천히 호흡을 조절해가면서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은 찾아갈 때마다 저에게 나지막히 이런 얘기들을 해 줍니다. 산은 꽤 괜

찮은 친구입니다.

가야산 중턱에 있는 개심사에 도착했습니다.

절이 아담하니 좋았습니다. 배불뚝이 기둥도 한 번 쓰다듬어 보고 들어가지

말라는데 들어가서 큰북을 치고 귀를 기울여 보았습니다. 둥둥둥 떨리는 파

동이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소리가 우직하면서도 잔잔하니 편안하더군요.

절에서 여기저기 뛰어다녀서 그런지 아~ 지금도 자꾸 하품이 나옵니다.

개심사에서 내려와서  혜미읍성에 갔습니다.

너른 들판 -  푸른색과 누런 색이 조화롭게 물들여진- 또한 개심사에서 몰래 들었던 북소리처럼 편안합니다.

비스듬이 허리를 누인 우아한 나무 한 그루.. 푯말도 없었지만 인상깊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도고 온천으로 갔습니다..

물이 진짜 좋아요. 피부가 보들보들해졌어요.

온천갔다가 수덕사 입구에서 저녁으로 산나물을 먹고 돌아왔어요..

돌아오는 길에 65학번 선배님들 말씀을 들었는데 특강을 듣는것처럼 재미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특히 열정을 잃지 말라는 당부가 가슴에 깊이 남았습니다.

  저는 최근에 저에 대한 큰 실망과 좌절을 겪었었는데 제 안에 있는 열정이라는 존재를 잠시 잊었었나봅니다.

전라도 말을 찰지게 하시는 60년대 학번 선배님의 사철가를 듣다가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다시.. 서울로.

노란색 가로등 수가 많아지면서 서울은 조용히 기러기 산행군단을 삼켜버립니다.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사는게 피곤하고 열정따위는 신발 속에 꾸겨놓고 짓뭉게고 싶을 때가 있습

니다.. 믿었던 사람이 나를 돌멩이처럼 보고 사랑하는 사람은 너무 멀리에만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걸  오늘 안겼던 야트막하고 푸군한 가야산처럼 포용하고 혜미읍성의 성벽처럼 꿋꿋하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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