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터 졸업생들을 위한 공간,

(2003-04-07 10:30:33)

모우

익숙한 그 집 앞 해장국

우울한 저녁 나뭇가지 흔들던
오랜 신음소리와 기침을 잃고
그리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밥상 앞에서
해장국 두 그릇
다가올 안개 같은 날들에
흐린 소주잔 기울인다

어젯밤 많이 취하지도 않은 저녁
해장국에 밥을 말아 먹고
해장하는 위장은
쓰리지도 아프지도 않은 저녁날
곰삭은 밥알을 넘긴다

누군가 떠난다면
나 역시도 떠날 것마냥
가려 했던 여행 가방 속의
칫솔과 속옷과 낡은 메모장
「바람이 분다
난 거기에 있다」
낙서마냥 꾹 눌러 쓴 바람 자국이 있다

모든 게 슬프고
모든 게 불안하던
어쩌면 그래서 행복했던
아파트 담벼락 밑
시멘트 구조물 사이로
새어나오던 불빛은
낯선 방문자의 관음증을 유발하고
한 뼘의 땅 밑에는
낮은 숨결로 흐르는 강물이 있었다

바람이 불기를 그치면
예전에 먹던 해장국의 밥알들 떠올리며
아마 밥알을 세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낯선 침실에서
낯선이와 밥상을 마주하고
밥알 동동 뜬 식혜만 봐도
해장국 두 그릇에 불어터지던
흰 몸뚱어리를 만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부는 곳을 향해
온몸을 기울이던 나뭇잎과
소리없는 도서관의 눈물 베인 책장들
난,
어느 틈엔가
무덤을 만들고 있었다

익숙한 그 집 앞에서
언젠가는 익숙하지 않을
해장국 한 그릇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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