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지치고 술에 지치다가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가졌다.
그저께는 칼퇴근에다 약속도 없어서 혼자 뭘 할까 찬바람을 맞으면서 걷다가 생각했는데 문득 영화가 생각났다.
제목에서부터 뭔가 찌릿하고 처절한 뉘앙스를 풍기는 저 영화를 보려고 혼자 표를 끊고 들어갔는데 예상대로 극장 안은 썰렁~
팔을 떡하니 괴고 분위기 있게 스크린을 응시했다.
주인공(기타노 다케시, 영화에선 재일조선인 '김준평')의 악질적인 삶을 지켜보면서 기분이 찝찝하고 질려버렸다. 영화 말미에 주인공이 인간이 아닌 괴물로 불리게 되는 경로는 러닝타임 두 시간이 넘도록 씹어보면서 알 수 있게 된다. 영화에 묘사된 주인공은 이기적인 본능을 감추고 사는 위선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중심적(자기중심적 하고 이기적 하곤 좀 다르지만)이고 폭력적인 근성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유감없이 발휘하는 야만의 모습이다.
부인, 자식, 첩, 친척, 공장에서 부려먹는 종업원들, 채무자들... 어떤 존재이건 주인공한테는 발밑에 깔린 하찮은 돌멩이일 뿐이다. 이들한테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주인공의 착취와 폭력은 (부인을 강간하기도 하고, 자식에게 난 니 애비가 아니라고 솔직히 인정하기도 한다), 지극히 계산적이거나 뚜렷한 동기가 있다기 보단 험한 세상을 생존에 급급하면서 굳어진 삶의 소통방식이고 자기확인이다. 폭력말고는 주위와 대화할 줄 모르고 돈에 대해서는 냉혈적으로 집착하면서도 긁어모은 돈으로 첩을 사서 탕진해 버리는 소모적인 삶을 살다가...끝내 가족들이 등 돌리고 심지어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는 언해피엔딩을 맞는다.
그렇게 한쪽 다릴 못 쓰고 백발이 성성해져서도 몰래 돈을 빼돌린 첩을 지팡이로 때리려다가 되려 얻어맞는 안쓰러운 주인공의 몰골을 보면서, 죽을 때까지 무언가에 집착하는(재물이든 여자든간에) 이 인간의 행적은 어디까지 가야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인지 영화가 끝날 때까지(결국은 북한에 돌아가 최후를 기다린다는 설정) 지루하게 꼬리를 문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몇 해 전에 본 <박하사탕>이 떠오른다. <박하사탕>을 보면 너절한 삶에 지친 설경구가 거꾸로 타임머신(쫌 그렇다, 철길이지ㅎㅎ)을 타면서 잃어버렸던 내면의 꿈과 추억, 순수함을 되찾는 걸 보면서 그걸 보던 나 자신도 동화되고 마지막에선 눈물이 글썽였는데. 하지만 <피와 뼈>는 <박하사탕>에서 보여준 아련함과 바람에 살랑거리듯 넌지시 비추는 희망같은 것에 여지없이 냉소를 던지고 만다. <피와 뼈>의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는다. 화해나 용서도 없고 포용도 없다. 어떤 것도 작위적으로 만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잔인하게 보여주는 감독의 눈. 그 눈을 통해서 인간과 세상이 마찰하고 목조르는 어두운 단면을 학인하고, 씁쓸하게 밤공기를 마시면서 정말 내가 걸었고 지금도 걷고 있는 길을 언제 또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가 질문한다.
주인공의 야만스러움과 악행의 책임을 주인공에게만 지울 수 있는 걸까. 그 시대가 식민지조선에서부터 한국전쟁후까지, 궁핍과 착취가 인간을 점령하고 비굴하게 만들고, 집단주의(전쟁과 민족을 줄기차게 주장하면서)속에 개인을 가둠으로써 오로지 타인과 타집단을 밟고 일어서는 것만 가르쳤지 나와 네가 다르다는 건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것이 아니었나. 명령과 복종, 복종 안 하면 강제와 폭압을 휘두르던 일본 군국주의나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어쩌면 주인공 김준평의 모습에 어느정도 반영되 있는 게 아닌가.
영화 보고 나서 다시 떠올리는 장면. 삶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현해탄을 건너는 젊은 김준평의 기대감에 부푼 모습. 영화에서 주인공의 긍정적인 모습이란 요것밖에 별다른 게 없다. 그리고 배를 타고 드디어 오사카에 도착했을 때 맨 처음 그를 맞이한 건 즐비한 공장굴뚝들이다. 희망과 비극이 언뜻 교차하는 것 같기도 한... 당장에 먹고 살 길을 찾았는데 자본주의 생존법칙에 길들여져 인간성을 잃어버림을 암시하는 걸까(?) 공장굴뚝은 후반부에 김준평의 부인이 죽을 때 쯤 또 나온다. 처음에 나왔던 굴뚝하고 다르게 시커먼 매연을 노골적으로 내뿜는다(그 장면은 전통가옥의 지붕처마와 대비를 이루면서 지붕 너머로 시커먼 공장굴뚝이 우뚝 솟아있는 모습이다). 그 모습이 딱 주인공을 대변하는 것 같다. 악착같이 살아서 일해서 벌어야 한다는 생존의 강요, 그래서 피폐해지는 인간성(공장굴뚝)-그 와중에서도 옛 전통가부장 권력 아래 가족들을 가두고 싶은 욕구(한옥 지붕처마). 다른 분이 이 영화를 본다면 내가 언급한 이 두 장면을 유심히 보고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 밖에 김준평을 인간적으로 좀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병에 걸려서 머리털 빠지고 대소변도 못 가리는 첩을 김준평 그 괴물이 애지중지 보살피는 장면도 있다. 나중엔 편히 죽으라고 배게로 숨통을 조여서 죽이지만...
또 딸이 돈문제 때문에 남편의 학대에 못 이겨 자살하자 분에 못 이겨 딸의 남편을 두들겨패고 장례식장이 난장판 되는 것... 이것만 보곤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알 수 없다. 있을 때 잘해야지. 돈은 벌레같이 모아놓고 딸한테 돈 좀 줬으면 딸이 자살까지 하는 비극은 막지 않았을까. 이미 벌어지고 나서야 깽판치고 난리 치는 것, 죽은 딸이 좋아할까.
대강 영화는 뭐 이렇다. 그렇게 재미가 있거나, 척수를 파고드는 감동이 있는 것은 아니고, 왠만큼 참을성 있는 분이라면 의미있는 작품을 건졌단 느낌은 들 것이다. 좀 찝찝하겠지만.
이 영화는 재일교포가 일본사회에서 겪는 차별이나 갈등, 분노 따위를 담은 영화가 아니다. 그런 건 영화에서 별로 중점적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굳이 일본이 아니라 한국을 배경으로 했어도 전달하려는 의식이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감히 얘기해본다. 그러나 최양일 감독이 재일교포 출신이라니 할 말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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